위기의 절벽 끝에 선 한국교회

한국교회 미래를 생각한다.

박광서 목사 /큰사랑교회 myroi@hanmail.net

주제 1. 위기의 절벽 끝에 선 한국교회

 

5-6년 전 신간 서적을 살펴보려 서점에 나갔다가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최윤식이라는 미래학자가 쓴 《2020년 부의 미래지도》라는 미래예측서로, 평소 관심이 있던 분야라 그 날로 구입하여 읽었다. 다른 미래예측서와는 다른 신선한 느낌이 있었다. 사회과학적 통계와 미래기법에 근거한 객관적인 예측도 예측이지만, 목회자 출신답게 영적인 냄새를 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가 제시한 조언대로 정부가 귀 기울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동안 정부의 경제정책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기득권 세력을 위한 ‘폭탄 돌리기’에 급급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결국 대통령이 ‘백약이 무효하다’는 탄식의 볼멘소리를 할 지경에 이른 것이 현실이다. 5-6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귀를 닫고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위기의 절벽 끝자락에 서 있는 한국교회 역시 앞서 언급한 정부의 어리석음을 답습하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최윤식은 《한국교회 미래지도1.2》에서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설명하며 미래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절벽 끝에 위태하게 서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필자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다가오는 미래의 영적 쓰나미를 함께 고민하고 대처함으로 잘 극복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 글 역시 그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나왔다. 목회 현장, 신학교, 그리고 새로운 영적 세력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오늘의 실상을 숙고해보자.

 

Ⅰ. 목회 현장의 실상

 

지난 2월 26일 자 국민일보에 실린 ‘신학교 지원생의 감소’라는 기사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교회가 영적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다. 우리는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무리하게 낸 빚을 감당하지 못해 이단에게 넘기는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접한다. 최근에는 신학대학원대학교마저 매물로 많이 나오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리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교회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보다 더한 소식도 듣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주소 두 가지를 들여다보자.

 

1. 주일학교 어린이의 현저한 감소

 

한국교회의 70-80%는 50명 이하의 작은 교회들일 것이다. 이들 중 재정자립을 한 교회가 얼마나 될까? 목회자 사례를 정상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실상을 들여다보면 목회자나 사모가 일을 해야 생활이 될 정도로 매우 열악한 교회가 많다. 이들에게는 정부의 성직자 세금과세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기초생활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교회가 다음 세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주일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그림의 떡과 같다. 각 교단마다 이구동성으로 교단산하 개체교회의 60% 가까이 주일학교가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필자가 속한 노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인구감소의 여파는 교회학교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특별히 저학년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미래에 교회를 책임질 다음 세대가 없음을 뜻한다. 길게 20년 후쯤이면 한국교회도 유럽교회처럼 백발의 노인 몇 분이 자리하는 텅 빈 예배당 즉,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보편화될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최윤식은 2050년 한국 기독교인 수를 현재의 반 토막인 400만 명 정도로 예측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대도 현재 교회를 이끄는 기성세대 목회자나 성도들은 별 반응이 없는 것 같다. 아직은 자신들의 예배당이 그런대로 차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가! 작은 교회는 다음 세대를 세울 힘이 없어서 문제이고, 큰 교회는 본질보다는 비본질을 즐기며 더 이상 헌신하거나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모양새다. 그동안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마치 앞으로의 문제는 미래 세대의 몫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2. 세상에 중독된 교회

 

교회가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필자는 그렇게 된 여러 원인들 중 세속화의 영향에 주목한다. 유럽교회에서 세속화란 ‘탈기독교’를 의미했지만, 한국의 세속화는 ‘세상을 닮아감’을 뜻한다. 1990대 이후 한국교회는 그 성장의 정점을 찍고 하강하면서 지독히도 세상을 가까이했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세속화와 맥을 같이 한다. 여기에 신사도운동과 같은 비성경적인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면서 교회는 비난과 침체를 자초했다. 교회성장에 도움만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윤리적, 비상식적 행동을 죄책감 없이 저질렀다. 그로 인해 세상은 교회를 타락과 부패의 온상처럼 여기게 되었다. 입이 열 개라도 교회는 할 말이 없다. 참된 본질에서 너무 멀리 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병폐가 깊어졌는데 교회는 고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아니 병세가 너무 깊어 치유불능이라면 격한 표현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 부흥기의 신기루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영적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데도 호시절이 다시 올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는 “교회는 영적 전함(戰艦)이 되어야지 유희를 즐기는 유람선(遊覽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악한 영과 전투하는 전함일까? 아니면 유희를 즐기려는 유람선일까? 강단의 메시지의 유형만 살펴봐도 십자가와 부활, 죄와 회개, 구원의 은혜와 성화, 심판과 영생의 온전한 복음의 선포보다는 왜곡된 신유와 축사와 기복신앙에 근거한 거짓복음이 넘쳐나고 있다. 교회가 바른 복음을 더 거북해 하는 기이한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세속 병이 참으로 깊이 들어 있다.

 

Ⅱ. 신학교의 실상

 

얼마 전 신학대학 교수 한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교수들의 착각에 대해 탄식했다. 그의 하소연의 내용인즉 많은 교수들이 자신이 똑똑하고 실력 있으면 강의실은 언제나 학생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과연 똑똑하고 실력 있으면 강의실이 가득할까? 앞서 언급했듯이 주일학교의 감소는 미래 목회자 지원자의 감소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교회의 감소는 사역자에 대한 수요의 감소로 이어지고, 신학생의 감소는 신학교의 존폐와 직결된다. 이는 경제의 수요공급의 원리만 고려해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착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시대를 읽지 못하는 헛똑똑인 것이다. 이미 신학생의 감소와 더불어 신학교조차 매물로 나오는 위기의 시대에 진입한지 오래다. 교회의 건강한 성장이 신학교의 존폐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수의 또 하나의 신기루를 조심스럽게 읍소해 본다. 학자들의 약점이라면 아무래도 목회현장 감각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필자는 신학은 교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신학교는 교회가 십자가의 진리에 바로 서서 영혼구원과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이정표 같은 중요한 기관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실한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 신학교가 그동안 그런 측면에서 많은 노력을 해 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최근 학계의 모습은 지금 어떤 영적 세력이 밀려오는지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교회와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지식의 향연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근자에 이단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학자들이 현실을 직시할 때쯤 되면 불행하게도 그때는 치유가 힘든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똑똑한 것 같아도 오히려 둔한 사람들이 학자들이라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학자는 목회자가 보지 못하는 시대를 읽는 눈이 하나 더 있어야 올바른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Ⅲ. 밀려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쓰나미

 

현재의 유럽교회의 실상은 한국교회가 마주할 미래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현재 유럽사회를 가장 힘들게 하는 세력은 이슬람이다. 이들이 짧은 시간에 유럽을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다문화정책에 따른 급격한 무슬림의 유입’과 ‘인구 폭탄(population bomb)’을 들곤 한다. 출산율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평균 1.6명을 낳는데, 이 수치는 현상 유지를 위한 1.8명에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유럽인의 인구감소가 예상된다. 반면 무슬림들의 출산율은 “자녀를 많이 낳아서 이슬람을 번성케 하라”는 무함마드의 마지막 설교에 충실하여 평균 6-8명을 낳는다. 금세기 말에 세계 인구의 50%가 무슬림이라는 예측을 감안하면 유럽의 무슬림 인구가 유럽 본토인의 인구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하겠다. 무슬림이 그 나라 인구의 10%이상 되면 국가적으로 혼란에 빠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미 우리는 프랑스, 영국, 스페인에서 계속된 테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있다.

 

과연 무슬림의 유입과 인구폭탄만이 유럽의 문제의 진정한 원인일까? 유럽사회의 건강도에 빨간 불이 들어온 지 오래다. 이슬람이 유럽에서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갈등과 불만이라는 텃밭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갈등은 이슬람이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양분이다. 불만세력이 많아야 개종자들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그들은 이슬람 국가 내에서조차 폭력과 테러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나 여러 테러단체들이 자국 정부의 전복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저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양극화로 인한 유럽의 사회적 갈등은 이슬람이 수월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요소였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 역시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의 수위가 높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3포, 5포, 7포, N포세대, 여기에 최근엔 노(老)포세대라는 신조어마저 생겼다. 이런 표현들은 사회의 갈등이 점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언젠가 그 분노의 게이지는 폭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폭탄의 기폭제가 될 세력이 바로 이슬람일 수 있다. 한국에도 이미 내,외국인 포함 많게는 40만의 무슬림들이 있다고 추정한다. 이들은 오일머니를 등에 업고 고도의 전략으로 한국에 침투하고 있다. 무슬림들이 한국의 정관계에 침투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공을 들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파키스탄 귀화인이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신청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교회가 지금처럼 본질에서 벗어나 방황한다면 유럽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유럽의 급격한 이슬람화의 궁극적 책임에 있어서 교회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세상을 치유할 소금과 빛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지난 20세기 이후 유럽교회는 정권과 야합하여 침묵해 왔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신학자는 온갖 죄악의 동조자 노릇을 했다. 이런 상황에 양떼들이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결국 자신의 본능을 추구하며 죄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 방황의 상징이 동성애며 그것은 차별금지의 법제화로 굳어졌고 이제는 사회가 치유 불가능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거두게 된 열매이다.

 

최근 영국 쉐필드 대학의 펠릭스 응골레(Felix Ngole)라는 학생이 동성애를 금지하는 레위기 20장의 본문을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했다가 학교 측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과연 한국에서 상상할 수 있을까? 왜 유럽이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곧 우리가 마주할 모습일 수 있다. 주일학교의 부재, 급격한 교회의 세속화, 목회현장과 괴리된 신학교, 사회갈등 세력으로서의 이교집단의 등장은 우리가 서 있는 절벽의 실상이다. 치명적 실수로 허우적거리면 이내 절벽 아래로 추락할지 모른다. 필자는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10년이라 본다. 교회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래 있어야 자리를 지켜야 한다. 느헤미야처럼 한 손으로 성벽을 쌓고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온전히 대처해야 한다(느 4:17).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음이다.

 

주제 Ⅱ. 포기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

 

세계 경제 위기와 시리아 난민 문제로 전 세계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국사회 역시 서서히 이슬람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혼란스러워 한다. 수쿠크 금융이나 할랄식품, 그리고 혹시나 있을 원리주의자들의 테러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교회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는데 반해 이슬람은 약진하는 것처럼 보여 교회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최윤식은 최근 저술한 《2030 대담한 도전》에서 2050년 경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에 의해 세계적인 종교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99.9%로 예측하고 있다. 그의 책 제목처럼 그가 대담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의 주장에 대해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이유는 이슬람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10년을 지혜롭게 선용하지 않는다면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기회를 놓친 유럽과 미국교회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을 목도한다. 이에 필자는 21세기에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이슬람의 속성이 무엇인지 살핀 후에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Ⅰ.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영적 세력

 

유럽교회는 세속화라는 난치병에 걸려 유럽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했다. 그 틈을 잠식해 들어와 마치 길 잃은 유럽의 유일한 소망인양 교회의 자리를 갈취한 세력이 이슬람이다. 필자의 견해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뼈를 깎는 대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유럽은 이미 기울어졌다고 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무슬림 인구가 전 유럽 인구의 10%에 육박해 가는 현 시점에서 역전의 순간은 그리 멀지 않았다. 사회적 갈등이 해소되고 이기적인 세대들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유럽의 이슬람화는 막을 수 없다고 본다. 유럽 사회와 교회는 지금 자신들이 이슬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고 있다. 한국은 그들의 탄식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슬람화가 위협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도대체 이슬람의 정체가 무엇인가?

 

1. 종교의 옷을 입은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혹은 민주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착각이 있다. 그것은 이슬람도 보편적 종교의 특성을 가진 종교로 바라보고 싶은 욕구다. 그러나 이슬람의 실체가 자신들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받는 충격은 결코 작지 않다. 당황, 황당, 두려움, 분노, 그리고 나중에는 담담함으로 이어진다.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사상과 삶을 추종하는 종교의 옷을 입은 이데올로기다.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는 보편적 종교로 접근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합쳐진 삶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만일 종교가 종교의 보편적 기능보다 정치성을 강하게 표출하면 이데올로기로 흐르기 쉽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정치가 기본적인 윤리마저 저버리면 과거 공산주의나 독재정권처럼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잔인한 해악을 저지르게 된다.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극한 만행도 서슴지 않고 행한다. 이런 정치적 위험성이 이슬람에 내포되어 있다.

 

IS와 같은 원리주의 테러집단이 종교를 빙자한 정치성을 강하게 표출하는 대표적인 샘플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잔인한 행위의 근거를 꾸란과 하디스에 두며 합리화한다. 많은 무슬림들은 IS가 경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반박해 보지만, 그들의 행위가 과연 경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이슬람이 기독교나 불교처럼 보편적인 종교의 기능에 충실하다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무슬림들이 1,400년 동안 견지해 온 전 세계의 이슬람화와 그것을 위한 배타적 교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꾸란과 하디스 없는 이슬람을 상상할 수 있을까?

 

2. 모든 무슬림의 사명, 전 세계의 이슬람화

 

무슬림들은 전 세계가 A.D. 7세기로 돌아가 창교주 무함마드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보편적인 종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교리들을 수용한다. 그 예로, 거짓을 허용하는 타끼야(Taqiyya)교리, 계시의 취소를 인정하는 만수크(Mansukh)교리, 그리고 모든 무슬림은 무흠의 인간상인 무함마드의 삶대로 살아야 한다는 우스와 하싸나(Uswa Hassana) 교리 등이 그것이다. 이 교리들은 전 세계의 이슬람화를 위한 실천 강령과 같은 교리다. 비록 다수의 무슬림들이 평안을 소망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슬림들은 경전 앞에만 서면 언제나 작아지고 그 찔림에 의해 원리주의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경전은 끊임없이 전 세계의 이슬람화를 위해 지하드 전사가 되라고 재촉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이슬람화는 무슬림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야 하는 사명이다. 불신자(kafir)의 판단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무함마드의 사도됨의 인정여부인 바, 만일 우리가 무함마드의 사도됨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꾸란과 하디스 없는 이슬람이나 무슬림을 생각할 수 없다. 이처럼 이제껏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은 영적 세력이 우리 곁에 다가 와 꽈리를 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유럽의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동일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하다.

 

Ⅱ. 뼈를 깎는 갱신이 요구되는 한국교회

 

주일학교의 부재, 급격한 교회의 세속화, 목회현장과 괴리된 신학교 등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소들이다.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절벽 끝자락에서 위태하게 서 있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유럽사회와 교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슬람의 문제는 앞으로 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해야 총체적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능한 선에서 시급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1. 복음과 경건의 회복

 

최근 한국어린이전도협회 한국대표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도의 어려움은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관은 매년 3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작년에는 20만 명 대로 줄었다는 것이다. 전도를 어렵게 하는 상황이 갈수록 더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제일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복음을 제대로 체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필자 역시 동감하는 바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것들 중 하나는 ‘거듭남’, ‘중생’, 혹은 ‘회심’체험이다. 오늘날 목회자의 치명적인 문제 중 하나는 교인들의 거듭남의 체험 여부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교인을 신앙인으로 착각한다. 그러다보니 교회 속에 가짜복음을 추구하는 ‘명목상의 교인’,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교회의 세속화의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참된 성화는 거듭난 이후에 성령의 은혜로 시작된다. 그저 열심만 낸다고 하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 속물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비위나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비참한 죄인의 회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가능함을 온전히 깨닫게 해야 한다. 즉, 십자가의 은혜 체험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지만, 목회자와 교회는 이를 위해 바른 복음을 가르치는데 힘쓰고 기도와 헌신으로 도와야 한다. 이 체험이 있을 때에 비로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참된 경건의 회복은 이것이 전제될 때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2. 영적 지도자의 올바른 시대 인식

 

교회학교의 침체에 위기감을 느낀 교단마다 대책을 세우고 많은 노력을 한다. 필자가 속한 고신교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통적인 아쉬운 점을 발견한다. 하나같이 주일학교의 책임을 교사에게 돌리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수법, 전도법, 관리법 등 교사의 자질 향상에만 초점을 맞춘다. 물론 교사의 역할이 지대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갱신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유는 교사가 아무리 발버둥해도 그 열심을 한 순간에 좌절시킬 수 있는 존재가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지도자들의 시대인식과 각성이다. 지도자들이 성숙해질 때 교회학교의 부흥도 시작된다고 믿는다. 세상의 기업도 갱신의 기회가 7-8년밖에 남지 않았다며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교회가 시대를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본질에서 이탈한다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3.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한 각골지통(刻骨之痛)의 수고

 

기업도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경쟁기업과의 합병이나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불확실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상생(相生)의 몸부림이다. 교회는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하나?

 

(1) 분립개척을 실시하는 것이다. 작금의 교회개척은 비용의 부담이 크고 그에 따른 어려움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큰 교회들이 개척교회에 일정액을 일정기간 지원하는 형식을 취했다. 개척교회 입장에서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장기간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경우 교회는 매너리즘에 빠져 병이 들기 쉽기 때문에 이 방식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이동성장에 의한 부흥이 주를 이루는 시대에, 건강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목회자와 성도들을 모아 분립개척 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본다. 하지만 분립개척은 모교회의 큰 결단과 내려놓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지금처럼 더 커지려는 욕심으로 성장주의를 추구한다면 불가능하다. 또한 왜 큰 교회만 희생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를 인간의 소유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탐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교회는 결국 공멸하고 말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지혜가 필요한 위기의 시대다.

 

(2) 준비된 일꾼을 파송하여 돕는 것이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에 비해 여러 면에서 자원이 풍부하다. 경험과 열정이 있는 준비된 일꾼을 일정기간 가능성 있는 개척교회로 파송하여 다음세대 살리는 사역을 돕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필자는 적어도 3년 이상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할 수만 있으면 그 교회에 정착하는 것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2년의 생색내기 봉사는 할 만하면 본 교회로 돌아가게 되어 열매를 거두기 어려우며, 돕는 자 역시 모교회로의 복귀에 마음이 가 있어 온전한 충성이 어렵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상생(相生)을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면 일정부분 다음 세대에 대한 불안은 해소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역시 대승적 차원의 내려놓음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3) 총회와 노회의 협력과 지원이다. 분립개척이든, 일꾼 파송이든 상생의 마인드가 없으면 실현되기 어렵다. 다른 말로 어떤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눈으로 시대를 직시해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 총회와 노회는 다각도로 계몽에 힘써야 하며,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 교사, 그리고 성도들을 위한 효율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다음세대가 세워질 수 있도록 도모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임시방편이 아닌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낌없는 투자를 계속할 때에 한국교회는 위기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막힌 지원과 협력이 있다 해도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전도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포기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

 

우리는 이슬람의 위협과 함께 ‘고령화와 인구감소’라는 두 악재도 만나고 있다. 교회 역시 그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마다 3,000개 이상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고, 개척교회 정착률은 제로에 가깝다. 아마도 수년 내에 교회의 폐교, 합병현상은 낯설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나마 간간히 들려오는 부흥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80-90%는 ‘회심성장’이 아닌 교인간의 이동에 의한 ‘이동성장’인 것이 낯 뜨거운 한국교회의 현주소다. 그렇다고 교회가 맥없이 쓰러지도록 방임해야 하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향후 그 어떤 당황스런 일들이 일어난다 해도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만일 유럽처럼 교회와 신학자와 교인들이 진리의 입을 닫고 세상의 동조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실 것이다. 복음은 영원하지만 복음이 한 곳에 머물지는 않는다. 초대교회 신앙의 중심지였던 터키와 이집트 땅이 오늘날 무슬림의 땅이 되지 않았는가! 교회가 세상을 탐하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한다면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그날까지 이 민족에게 은혜와 기회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산소망은 교회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열쇠다.

 

박광서 목사는

 

인하대(B.A.)와 고려신학교(M.Div.)를 졸업했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Th.M.)학위를 받고, 백석대 대학원에서 청교도로 박사(Ph.D.)학위를 받았다. 그는 급격한 세속화와 진리의 상실로 인해 신음하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변혁시킬 수 있는 글로벌 영적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하나님의 꿈을 불태우는 행복한 목사이다. 현재 부천 역곡 소재 큰사랑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차세대 리더 양육가이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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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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