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시절 약속지키려 29년째 시골목회해요

진천지방 구산교회 김영선 목사의 목회농사

 

1985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4년간 아현교회에서 신학생 실습을 하면서 만난 김영선 목사님은 청년부를 지도하던 진보적 성향의 전도사님이셨다. 당시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와 민주화에 대한 대학가의 열망이 고스란히 교회로 옮겨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아현교회 청년부는 전도사님의 주도로 민중신학이 베어 있는 교재로 성경공부를 했다. 노래동아리 활동을 하던 기자는 민중가요를 교회 청년들에게 보급하며 전도사님과는 나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도모하는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현교회에는 당시 NCCK회장이셨던 김지길 감독님이 담임목사님이셔서 우리의 시도들은 꽤 자연스러웠다고 여겼고 개인적으로는 이 교회에서 신학생 실습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전도사님은 따로 영어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청년모임도 꾸리셨는데 거긴 내 영역이 아니었다. 다만 대학으로 신학강의를 나가시는 등 꽤 엘리트시구나 하는 막연한 존경과 청년들과 허물없으면서도 다양하고 깊은 유대를 유지하는 목회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도사님의 아버지셨던 장로님에 대한 기억도 참 좋다. 자그마한 체구에 늘 조용하셨다. 교육관 옆의 벤치에 앉아서 발끝을 치며 뛰어다니는 교회학교 아이들의 꽁무니를 흐믓하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난다.

기자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입대 할 즈음에 김영선 전도사님도 아현교회를 떠났다. 그리곤 30년 가까이 자세한 소식을 알지 못했다. 진천에서 목회하고 계시고 가끔씩 예전의 아현교회 청년들과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정도만 간간이 들려왔다.

잘 지내시지요? 구산교회가 올해 설립 6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면소재지도 아니고 30호도 안 되는 시골 에 있는 교회입니다. 198812월에 내가 여기 올 때 18번째 담임자로 와서 29년째 있습니다. 열악하고 가난해서 먹을 것도 부족했던 교회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조금 놀랐다.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 놀란 게 아니라, 그리 오랫동안 시골교회에 계셨다는데 놀랐다. 도무지 시골생활과 어울리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학을 하고 대학강단에 서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은 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시골 목회를 생각했다고 한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는 한창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격렬했고, 민중신학이 유행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신앙의 문제로 고민도 하지 않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지도 않았습니다. 좋은 유치원도 다녔고 지금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저와 같이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며 살겠습니다작고 어려운 시골교회에 가서 목회하겠습니다.’라고

중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기록하는 생활기록부의 장래 희망란에 '목사'라고 썼다 한다. 어머니가 임신 중에 '아들이면 주의 종을 삼겠다'고 서원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목사가 된 이들이 꽤 있다. 고교시절에 좀 흔들리기도 했지만 결국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오류동교회와 아현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첫 부임지로 충청북도 진천의 구산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고 김지길 감독께서 몇 군데 도시교회를 소개해 주셨지만 모두 사양하고 그가 택한 임지였다.

구산교회는 목사님이 서리전도사로 부임할 때 31년된 교회였는데 워낙 시골에 있다보니 자립은 생각도 못하는 형편이었다고 했다. 그나마도 10여년 전에 그 작은 교회가 분열되어 어려움이 더했고, 선임 목회자들은 평균 1년 반마다 떠나가던 그런 교회였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도 부임해 오는 목회자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진급을 위해 잠시 거쳐가는 정도로 서로가 여기기 때문에 오면 오나보다 가면 가다보다하게 된다. 그래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도무지 성장할 환경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문제로 치부된다. 이정도 되면 목회자는 이런 교회에 부임해 준것만으로도 성도들은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도들은 목회자의 생활을 책임져 주지 못하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김영선 목사님의 그 당시 이야기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어서 부엌에서 수건에 물을 묻혀 대충 샤워를 하고 0시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이야기를 좀 하자면, 밖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매섭게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촛불이라도 켜놓고 볼 일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밑에서 올라오는 세찬 바람에 온 몸이 얼어서 볼 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부임해서 갔을 때, 4살짜리 아들은 재래식 화장실이 익숙하지 않아서 4일간 볼 일을 못보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내와 같이 심방을 가거나 기도원에 갈 때는 어린 아들을 인근에 있는 권사님 댁에 맡기고 갔습니다. 권사님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현우야, 밥 먹었니?” “, 라면 먹었어요.” 그런데 그 후 같은 상황에서 권사님의 같은 질문에 아들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권사님은 아들이 라면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라,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농촌인데도 쌀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0시에 교회에 가서 아침을 맞도록 기도하고, 월요일에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언가 자신을 희생해야겠어서 아침 금식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기자 생각으론 쌀을 아끼려던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이 아침금식은 10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물질적인 것에도 구애받지 않으려고 받은 사례비는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로 다시 다 드렸다. 돈이나 세상의 어떤 것을 의지해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살겠다는 것을 교인들에게도 보여주고, 하나님에게도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제가 구산교회에 온 1988년 결산이 400만원 조금 안됐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1989800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에는 1600만원이 되었습니다. 1991년에는 3200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는 6400만원이 되었습니다. 몇년동안 매년 정확하게 갑절로 늘려 주시는데, 정말 놀랍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구산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를 주님의 일을 위하여 값지게 사용하고자 인도의 안드라 프레디쉬에 교회를 개척하고 예배당을 지었다. 그리고 담임자의 생활비를 10년 동안 전액 지원했다.

그런 과정에서 교인들의 의식이 변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하다고 김목사님은 말한다. 주일 예배에 대표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우리같이 작은 교회, 우리같이 가난한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라고 기도하길래 김목사님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셨고 우리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작고 가난하십니까? 앞으로는 절대 그런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기도를 했던 습관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 않던 기도가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경험한 후 작고 가난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식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2002년에는 오랜 숙원이었던 예배당을 건축했다. 1967년 마을 앞 냇가에서 모래를 퍼 와서 목사님(우병철)과 교인들이 직접 벽돌을 만들어 지은 교회 건물은 무엇보다 냉난방이 되지 않아서 쾌적한 환경에서 예배드리기가 어려웠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직영을 했는데 그나마 설계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공사 계획을 짜고, 인부들을 모으는 공사감독에, 건축자재를 일일이 사고 시공에도 참여하는 등 온갖 허드렛일까지 해야 했다. 몸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다음날 와서 기분 좋게 일하라고 인부들이 공사를 마치고 가면 현장에 나무 조각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았다. 사모님은 먹고 기분 좋게 일 잘 하라고 인부들 식사와 오전 간식, 오후 간식을 매일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인부들은 교회의 정성에 이제 다른데 가서 일 못하겠습니다고 까지 했지만, 사모님은 손목에 무리가 가서 나중엔 젓가락질도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밤에는 교인들과 모여서 기도회를 가졌다. 집에 들어가면 녹초가 됐지만, 이런 저런 준비하고 나면 새벽 1, 2시가 됐다.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나가서 또 일을 했다. 목사님만 일을 한 게 아니라 교인들도 나와서 했고, 일을 할 수 없는 교인들 까지 포함해 전교인이 아침 금식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쓰러져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을 정도로 예배당 건축을 위한 목사님과 교인들은 헌신적으로 일했다.

교회건축을 하다보면 대부분 이런 고생을 한다. 그중에 목사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김현우)에게 참 미안해했다. 아들은 당시 충북 청원군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 다니며 학교 앞에서 자취를 했다.

저희가 교회를 지은 2002년에 아들은 고3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부가 교회를 짓는데 올인하느라고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과외나 학원도 다니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수능 시험을 치르는 날, 청주에 있는 시험 장소에 데려다주고, 인테리어 필름을 파는 집에 가서 자재를 사가지고 와서 하루 종일 공사를 했습니다. 청주에서 집으로 오는 동안 차안에서 기도하는데, 무엇보다 고3 내내 따듯한 아침 밥 한번 못 해준 것 때문에 눈물이 났습니다

현우는 자신이 원하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ROTC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CBS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년간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그리고 미국의 감리교 명문인 에모리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M. Div) 과정을 하고,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석사과정(STM, Master of Sacred Theology)을 마친 뒤, 지금은 에모리대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구약성서학으로 박사과정(Ph. D)중에 있다. 현우는 지난해 7월 연세대에서 개최된 세계적인 성서학회 SBL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국제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 주목받는 젊은 신학자이다.

제가 주님의 일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올인했더니 하나님께서 저의 자녀를 책임져 주셨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록 사는 곳이 시골이고, 교육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자녀 앞길까지 책임져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목회 기간 동안 김영선 목사님은 교회를 옮길 수 있는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다. 특히 화양교회에서 은퇴하신 김종순 목사님은 김영선 목사에게 수차례 전화를 거는 것도 부족해서 진천까지 2번이나 찾아 와서는 같이 목회할 것을 권유했다. 김영선 목사님의 거절에 자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녀 교육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김영선 목사님의 사촌 형인 김영대 목사님이 미국 뉴욕 주의 로체스터에서 목회 할 때, 김영선 목사님을 데려가려고 일부러 귀국까지 했던적도 있다. 그때 김영선 목사님은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자녀가 어릴 때고, 초청하는 목사님이 자녀 교육뿐만 아니라, 김영선 목사님의 유학을 뒷바라지 해주고, 후임으로 물려주겠다는 약속까지 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목사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고, 자녀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김목사님은 미국행을 포기했다. 시골에서 목회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서였다. 대신 하나님은 김목사님의 꿈을 아들 현우를 통해 이뤄주셨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촌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없고, 아이들도 없다. 구산교회는 동서남북 사방에 논과 밭만 있는 리()에 있다. 마을 가구수가 30호도 안 된다. 물론 교회가 위치한 마을엔 아이들은커녕 젊은이도 없다. 그런데 올해 어린이주일에 초등학생 이하 36명의 아이들에게 안수를 하고 축복기도를 했다. 그리고 곧 2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이 시골교회에 어떻게 아이들이 많을수 있을까.

김목사님은 목회초기부터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목회를 했다고 한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 중고등학생들을 데리고 매년 여름과 겨울 방학, 심지어 봄방학 때도 기도원을 가고 수련회를 다녔다. 그 당시 전도사님과 같이 부둥켜안고 기도를 하던 아이들은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도 받았다.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고 시골에 살지만 세계적인 비전을 품도록 도왔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그 당시 경험했던 믿음의 추억과 유산이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고향 교회를 섬기게 하고 있다. 결혼을 앞둔 자매들이 사귀는 남자에게 확인하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 “나는 결혼해도 구산교회를 계속 다닐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청주, 오창, 증평 멀리는 수원, 평택으로 이사를 간 가정까지 매주 구산교회로 오기 때문에 아이들이 많은 것이다. 이 아이들은 30년 목회농사의 결실이자 구산교회의 미래이다.

 

올해 구산교회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여러 가지 사업을 실시했다. 먼저 갈렙선교회를 통하여 북한에서 고통 받는 아동을 탈출시켜서 대한민국으로 입국시켰다. 장장 10만 킬로가 넘는 생명을 건 탈출이었다. 이 탈출은 채널 A에서 천국의 국경을 넘다. 브로커라는 제목으로 2016년도 방영된 적이 있다. 이들 자매는 올 초 대한민국에 입국했고, 524일 하나원(북한 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교육을 마치고 나와서 정착했다. 구산교회는 몇 년 전부터 부활절 헌금을 탈북민들을 국내로 데려오는 일에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매달 이들 자매들에게 장학금을 후원하고 있다.

 두 번째는 아프리카 차드Chad)의 게베세(Gvebesse) 마을에 우물을 파서 주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해주었다. 아프리카 마을에 우물을 파는 것은 그 마을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사진). 그리고 차드의 암파드낭(Amfadenan) 마을에도 우물을 파서 제공했다.

세 번째는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있는 화산섬으로 이루어진 까보베르데(Cabo Verde)에 교회를 개척하고 현재 교회를 짓고 있다(사진). 그리고 아프리카 브루기나파소(Burkina Faso)의 발로고(Balogo) 마을에도 교회를 짓기로 했다. 현재 그곳은 우기이고 30km의 비포장된 광야의 모래황토 길은 자재 차량의 운행이 불가능해서 건기가 시작되는 10월 말부터 공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넷째, 옷캔(Can, 외교부 소관 비영리 법인)을 통하여 아프리카에 500여벌의 옷을 보냈다. 구산교회가 아프리카 선교에 힘쓰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복음이 영혼을 구원한 것만 아니라, 가난과 무지와 질병과 우상숭배에 억눌려 있던 우리민족을 해방시켜서 근대화를 이루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생명도 구하고 그들의 삶도 윤택하게 해 주려는 비전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최근 아프리카에 오일 머니를 등에 업은 이슬람의 팽창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슬람에서는 마을에 우물을 파주고 이슬람 사원을 세움으로 마을 전체를 이슬람화 하고 있다. 이렇게 이슬람을 받아들인 후에는 개종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이슬람의 확산을 막고자 그들의 방법으로 구산교회는 우물 파기와 교회 개척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구산교회가 우물을 파서 제공한 암파드낭 마을은 2천여 명의 주민이 거의 다 이슬람신자다. 그곳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돈을 받고 물을 팔고 있기에 대다수의 주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우물을 파고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이를 통해 이미 여러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 외에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를 통하여 63명의 성도들이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그중 53명의 성도는 사후 각막 기증만이 아니라 모든 장기 기증에 서약했다. (사진) 이러한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가 이웃이 되어야 하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곧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는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선한 사마리아 삶 비유)에 근거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김목사님은 고백한다.

지난 611일 구산교회는 교회설립 60주년을 맞아 기념음악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다 해봐야 30가구가 넘지 않는 시골의 농촌마을이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 감사하며 벌인 축제이자 사명을 새롭게 다지는 결단의 자리였다. 이 작은 교회는 이제 마을을 넘어 멀리 아프리카까지 품는다. 김목사님 역시 진급을 위해 잠시 거쳐 가는 목회의 여정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도 모를 하나님과 맺은 신학생 시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은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자신의 목회 평생을 바치고 있다. 그 목회가 세간에서 말하는 엄청난 부흥이나 목회적 성공이라고 할 만하지는 않더라도 환경이나 상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제 스스로 목회지를 옮겨보려고 생각하거나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 제가 필요했다면 저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것은 제가 아직도 여기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작은 바램이 있다면 어려운 환경에 있는 교회나 동료 목회자들도 용기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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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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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krzlee

2017.10.18
14:35:15
(*.112.119.145)
그래도 아직은 교회요, 별같은 당신의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는 한국입니다. 절망 중에 희망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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