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자료

2.복음의 제 2 세대(1927-1964)



<사진 2-사상 교회 면려 청년회(1937년 촬영)>

2.복음의 제 2 세대(1927-1964)
*교역자
(1928-1945) 해방 이전-박 찬규, 구 종철, 오 성문, 이 승원, 최 명수, 손 양원, 정 해동, 정 덕생, 김 희수, 임 학찬, 이 여진,
(1945-1950) 해방 이후-이 영규, 안 광국, 김 경원, 김 인서, 김 은석
(1951-1962) 교회 분열
사상 교회(총회 측)-최 문환, 이 상호, 김 근수, 한 학수
사상 중앙 교회(고신 측)-허 내봉, 최 대연, 김 세주, 김 정규, 남 영희
(1962-1964) 교회 합동-김 경원, 박 창환
*직분자
정 찬모 영수, 김 장권 영수, 김 길준 장로, 방 문수 장로

(1) 괘법 교회(1927-1966)
(교회 건축) 1918년 가느곡 교회에서 장립을 받은 장연식 장로는 사업차 부산 영주동 교회로 떠나면서 손 치만, 정 찬모, 김 장권 제씨의 공동 명의로 가느곡 교회를 이전했다. 1927년 경부선 복선화 공사 계획으로 교회 부지가 사상 역 구내에 편입되므로 목수였던 정 찬모 영수가 교우들과 힘을 합쳐 벼락산 기슭의 괘법동 829 번지에 대지 75평, 건평 20평의 목조 기와 예배당을 건축했다.
(유치원 개원) 박 찬규 전도사는 1927년 괘법 교회를 짓는 동안 잠시 머물게 된 창날 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유치원을 개원했다. 1933년에 부임한 이 승원 조사가 부임했을 때, 박 찬규 조사가 떠나고 중단되었던 교회 유치원을 이 필연 사모가 다시 개원했으며 이미 영도 교회에서 유치원 보모로 가르친 경험이 있었다. 당시 사회적 형편과 이 지역의 문화적 수준으로 보아 교회가 유아 교육을 열었다는 것은 선각자적인 안목이었다.
(교회 설립 25주년 기념) 이 승원 조사가 시무하던 1934년에 교회 설립 25주년을 맞아 당시에 부흥사로 유명하던 진해 경화 교회의 강상은 목사를 모시고 집회를 가졌다. 인근 지역 교회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당시는 순회 전도사가 인근 여려 교회를 함께 맡아 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웃 교회의 교우들 간에도 우의가 돈독하여 집회가 있으면 내 교회처럼 침식을 가지고 와서 참석했다.  
집회 기간 중에 '사상 교회 설립자 및 제직일동'이라는 사진에는 이미 영도 교회의 시무 장로가 된 설립자 장연식 장로도 축하하러 방문하여 연로한 설립자들과 제직들이 함께 기념 촬영을 하였으며, 집회에 참석한 이웃 교회 성도들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때 찍은 두 장의 사진이 사상 교회의 연혁과 당시의 인물들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복음의 제 2 세대) 1937년에 촬영한 '사상 기독 면려 청년회'라는 제하의 사진을 보면, 이미 복음의 제2세대가 청장년으로 성장해서 든든하게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에는, 백 흥기 부부(백 영숙 권사의 형), 교역자 최 명수 전도사, 방 문수(장로) 부부, 손 일용(장로) 부부, 유 영흥(집사), 민 영석(목사), 류 영흥(집사), 이 영락 씨 부부, 손 성호(장로), 김 장권 영수의 여식이 되는 봉화(권사)와 봉금(권사) 자매, 안 금자(최 신홍 씨의 부인), 성 호일 집사(김 정규 장로의 모) 외에 여러 명이 함께 촬영했다. 당시 면려 청년회에는 5인조 악기가 있었다.
(신사 참배) 일제는 1940년에 창씨개명을 실시하고 1941년에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였다. 이전부터 국민의례로 시행되어 왔던 일본 천황에 대한 신사참배가 더욱 더 철저하게 강요되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가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데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교회를 보살피고 지도하던 호주 선교사들을 교전 대상국의 국민이라 하여 강제 추방했다. 조선인 강제징집과 부역, 그리고 전쟁 물자 조달로 인한 수탈로 인하여 민생을 극심한 가난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어느 교파에나 있었다. 당시에 민 영석 집사는 부산역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1942년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조사를 받고 2개월 여 만에 풀려나왔다가 이듬해 다시 투옥되어 고초를 당했다. 해방이후 고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농촌 목회에 헌신하였으며 장남인 민 상식 장로가 아버지에 대한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해방 전후 사상 교회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므로 교회사를 구성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소개령) 일제는 진주만 공격과 함께 이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1943년에 소개령을 공포하여 도회지 인근의 청장년들을 타 지역으로 분산시켜 전쟁 중에 민란의 위험을 줄이는 한편,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서 농지를 개간하도록 하였다. 사상 교회의 가족들도 소개를 하면 '징용을 피 할 수 있고 신사 참배도 면할 수 있다' 하여 관보에 고시된 소개 지역을 택하여 양산 하북면 백록리로 집단 이주하여 공동체 생활을 했다. 움막을 짓고 야산과 하천 부지를 개간하여 공출 품목인 감자 종묘를 생산하는 고된 노동을 했다.  
이때 함께 이주했던 사상 교회의 가족으로 김 길준 장로(1937년 밀양 교회에서 장립, 해방 후 사상 초등학교 교장 역임)과 우리 교회 조사로 시무한 적이 있는 정 해동 조사(목사)와 박 찬규 조사(목사) 그리고 방 문수 집사(장로), 손 일용 집사(장로), 손 일호 집사(장로), 이 영락 씨의 가족이다. 교회를 잘 섬기던 젊은이들이 집단으로 떠나게 되자 가뜩이나 어려운 시국에 더하여 교회는 극도로 쇠약해 졌다.
이즈음에 일본에서 신학을 졸업한 이 여진 전도사(대구 계성고, 한신대학교 학장 역임)가 잠시 머물다가 징용을 피하기 위하여 잠적했으며 김 장권 영수, 민 영석 집사, 이 필순 집사(김 성규, 종규 장로의 모), 김 성국 집사의 가족, 이 영수(이 재수 장로의 형), 유 점순 집사(이 대열, 학렬 장로의 모), 정 세환 씨의 가정이 남아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섬겼다.
(해방과 귀환) 해방은 우리 민족과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사상 교회 교우들은 교회에 비치되어 있던 북과 심벌즈를 치면서 교회 주변을 행진하였으며 사상 초등학교에 설치되었던 신사를 불태우고 감격의 해방을 축하했다.
소개되어 생활을 하던 교우들도 해방의 소식을 접하고 농장 정문에 솔문을 만들고 태극기를 그려 장대를 세워 달고 마을 주민을 모아 김 보배 집사(김 길준 장로의 처)가 애국가를 가르쳤다. 부리던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냄비 뚜껑을 두드리며 찬양하고 즐거워했다. 귀환의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해방된 이듬해까지 그간 애써 개간했던 농장을 버리고 돌아왔다. 교회는 다시 활력을 찾고 해방의 기쁨과 신앙의 자유로 인하여 감격으로 가득찼다. 순회 전도사가 함께 사역하던 낙동강 변에 산재한 대저와 구포 지역의 교회들이 해방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함께 연합하여 야외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되고 군중 시위와 폭동이 그치는 날이 없어 치안이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질서 유지를 위해서 조선 민족 청년단(이른바 족청)이 만들어 졌는데 사상 지역에서는 이 재수 집사가 단장이 되고 민 영석 집사가 총무를 맡았다.
(적산 불하) 해방이 되자 조선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떠나고 그들의 재산이 미 군정청 관할로 소속되었다. 닷새마다 열리는 사상 시장 통 주변의 괘법동 822번지에 퇴임한 구포 주재소 소장의 저택과 농장이 있었다. 당시 미 군정청에 근무하고 있던 허 증수 선생(박 도애 집사의 장남)를 통해서 구비 서류를 완비하여 이 건물의 불하를 신청했다. 마을 주민 대표들도 이 적산을 마을의 동사(회관)로 사용하기 위해서 신청했지만 미 군정청은 ‘신축 교회 부지용도’로 사용하겠다는 사상 교회에 손을 들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마을 주민들과 관계가 소원해져서 ‘이 곳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물과 불과 언어를 단절 하겠다’는 마을 공동체의 제재로 인하여 교회가 이 건물을 지켜 내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47년에 부임하여 고려 신학교를 다니던 김경원 전도사가 입대하게 되었고 이어서 교회 청년들과 학생들도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한 달 만에 영덕·안동·상주·진주를 잇는 선까지 북한군이 진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는 가운데 8월 초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釜山橋頭堡)’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기로 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벼랑에 선 위기를 맞아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강제 징집되어 겨우 일주간의 훈련을 받고 바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교 중에 가방을 든 채로 징집된 학생들은 가족에게 미처 알릴 틈도 없이 훈련소로 이송되었다.
교회는 참전자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그들을 위해서 공 사간에 간절하게 기도했다. 참전자 중에서 김 봉수(김 장권 영수의 자), 김 덕만, 이 경조(이 승원 목사의 형님) 집사의 두 아들 등 4명이 전사했으며 김경원, 손 성호, 김 정규, 김 성규, 김 봉찬, 김 성국,강호태 제씨와 학도병으로 방 태영, 손 인식, 이 대열, 강 창수 군이 생환했다.
사상 초등학교도 전쟁 직후에 국군 훈련소로 되었다가 이내 미군 보급 부대로 징발됨으로 학생들이 들은 칠판을 들고 들과 산으로 옮겨 다니며 공부했다. 이 와중에 학교 건물에 화재가 나서 전소되었고 당시 문교 차관이었던 허 증수 집사의 도움으로 지체없이 신축 했다.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을 동안 성탄절이면 콘셋 막사 부대를 방문하여 주일학교 성탄 축하 순서로 장병들을 위문 공연을 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하여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집결되면서 교인이 갑자기 증가하게 되었다. 특히 함경도 지역에서 피난 온 일단의 교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가포(삼락동)에서 함께 기거하다가 서울 수복과 함께 이주 했는데 이 기간에 최 문환 목사는 사상 교회를 담임했으며 안 희국 교수(한신대)와 일단의 젊은 청년들도 교회를 힘써 섬겼다.
가포(삼락동)에 전쟁고아들을 위한 시설이 있었는데 원생들이 집단으로 사상 교회에 다녔다. 그러나 지도 교사인 김인경 씨가 노 광공 목사(동방교)를 따라 이단으로 넘어가므로 교회 출석이 중단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고아원이 폐쇄되었다.  
(교회 분열) 해방 이후에 일제 치하에서 행한 신사참배에 대한 자숙과 회개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경남 노회에서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자숙에 대한 진정성과 강도를 두고 목회자들 사이에 여러 해 동안 다툼이 지속되었다. 교단 분열의 결정적인 사건은 총회가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단일화하며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폐교하도록 조처했다. 고려 신학측은 이에 반발하여 1952년 9월 진주 성남교회에서 경남 법통노회를 출범시키고 새로운 총회(고신 측)를 결성하게 된다. 고신 교단의 태동이며 부산 경남의 수많은 지 교회들의 내분을 촉발시키는 비극적인 교회 분열의 시발이 되었다. 우리 교회도 이미 분쟁의 초기부터 분열이 조짐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1909년 교회 설립 이래로 동고동락하면서 가혹했던 일제의 시련도 함께 견뎌내었던 사상 교회 교우들 간에도 교단의 다툼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마침내 고신측은 사택으로 사용하던 적산 가옥을 개조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사상 중앙 교회'로 명명하고 교회가 둘로 나뉘어 졌다.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1952년에는 고려파(高麗派)가 경남 노회에서 분열되었고, 1953년에는 기장파(基長派)가 분열되었으며, 1959년에는 통합측(統合측)과 합동측(合同측)으로 분열됨으로 이후에 장로교의 이름을 가진 수많은 교파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교회 합동) 1959년 서울 장로회 신학교 건축과정에 일어났던 불미스러웠던 일과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하여 지도자들 사이에 다툼이 평행선을 그으면서 마침내 총회가 나뉘어져서 연동 교회와 승동 교회에서 따로 모이게 되었다. 분열의 표면적인 이유의 내면에는 이전부터 지역과 지도자들의 파벌이 심화되어왔다. 한 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회 신학 측과 보수적인 신학을 대표하는 박 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총회 신학 측으로 나뉘어 졌다.  
1960년 10월에 대전 중앙교회에서 보수적인 신학을 표명하는 승동 측과 고신 측이 합동을 추진하여 12월 23일에 서울 승동 교회에서 합동하기로 가결했다.
당시 총회 측(통합)에 속한 사상 교회에 담임자가 공석 중이어서 김해 공군 부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하 재봉 집사의 주선으로 공군 부대 교회의 군목으로 사역하던 고신 측 한 학수 목사가 임시로 주일 설교를 맡고 있었다.
승동 측과 고신 측의 합동 분위기가 나누어진 우리 교회가 하나가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교회 합동을 위한 연합 재직회가 여러 차례 모였으며 동년 11월에 이르러 두 교회가 합하여 합동 노회에 속하기 했다. 교회 명칭은 분열되기 이전의 이름인 사상교회라 칭하기로 하므로 그해 성탄절은 10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된 뜻 깊은 축하 예배가 되었다.
(김경원 목사 청빙과 교회당 건축) 1962년에 고성 성내 교회에서 김경원 목사를 청빙 하였다. 김 목사는 1947년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를 다니면서 우리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징집되므로 사면했다. 김 목사는 이미 교회와 교우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성품이 온순하고 친화력이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분열한 이후에 두 교회가 모두 성장했기 때문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건축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이내 공사에 착공했다. 대지 106평에 건평 45평의 시멘트 블록으로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외벽을 쌓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창문을 단 후 아직도 완공이 덜되었지만 너른 예배당으로 옮겼다.
(고신의 환원) 1960년에 출발한 합동 교단은 서울의 총회 신학교와 부산의 고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합동 총회는 신학교 단일화의 일환으로 고려 신학교를 폐교 조치하고 서울의 총회 신학교로 일원화하기로 결의 했다. 이에 반발하여 1962년 10월 고신 측 대표 격인 한 상동 목사는 단호하게 고려 신학교를 복교 선언하고 다시 고신으로 환원키로 결정한다.
이러한 조치는 즉각 부산 경남의 각 교회에 또다시 분열의 회오리를 몰고 왔다. 김경원 목사는 고신의 환원에 대해서 명분이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반대 했다. 그러나 고신 측 교인들이 담임자의 의견에 완강하게 반대하므로 교회가 분열의 고비에 이르렀다. 새로운 예배당의 완공을 눈앞에 두었던 때였는데 또 다시 교회는 혼란에 빠졌다. 주일마다 강단을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이어지고 새벽 기도 시간과 공적 기도 시간에 서로를 비방 기도가 지속되었다.
(김경원 목사) 담임자가 사임하지 않았다면 역시 환원을 반대하던 총회 측 교인들과 함께 구 사상 교회 건물에서 합동 측에 속하는 사상 교회가 탄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무 조건도 임지도 없이 교회를 사면하는 희생적인 결단을 하였다. 김 목사의 이러한 노력이 오늘날 하나 된 사상 교회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으며,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나 됨의 정신’이다. 교회 분열을 온 몸으로 막아낸 선한 목자이며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이다.
(수습 위원회) 김경원 목사의 사임이후에 ‘어떤 명분으로도 다시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혼돈을 수습할 요량으로 제직회가 선임한 수습 위원회는 모든 지혜를 함께 모았다.
-1.환원을 끝까지 반대하는 이재수 집사에게 비록 한 가정이지만 이전의 총회 측 사상 교회의 지분을 주어 분리하도록 허락했다.
-2.환원을 반대하는 총회 측 교인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환원한 고신 교단에 속하지 않고 무소속 교회로 남는다.  
이재수 집사는 가족과 함께 합동 측에 속한 부전 교회로 옮겨 예배를 드리다가 10년이 지난 1973년에 이르러 가정 교회를 개척하고 사상 중앙 교회라고 명명했으며 이 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고 시무했다. 사상 중앙 교회는 현재 합동 측에 속한 한남 교회로 발전했다.
(박 창환 목사 부임) 분열이 겨우 봉합되자 새로운 담임자로 가술 교회 박 창환 목사를 청빙하였다. '청빙 위원회'는 박 목사에게 교회의 제반 상황을 상세하게 알리고 교회의 분열의 막고 정상화를 위한 몇 가지 제안에 협조해 줄 것을 제안했다.
-1.교회가 무소속이기 때문에 어느 교단도 편들지 말 것
-2.교회 정치는 수습 위원회에 맡기고 관여하지 말 것
-3.교단에 소속할 때에는 공동 의회의 결의에 따를 것
1964년에 박 창환 목사는 이에 동의하고 부임했다.
처음부터 철저한 신앙생활 구체적으로 강조하면서 소신 있게 목회를 시작했다. 교회당 한켠의 목양실에 나무 침대를 두고 그곳에서 취침 했다. 갓 40세에 들어선 젊은 사역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인기도 생활과 엄격한 자기 관리는 교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언제나 새벽 기도의 시작과 마지막 자리를 지켰으며 특별히 직분자들의 새벽 기도와 헌금 생활을 매번 강조했다. 함께 모시고 있던 부친 박 도홍 목사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대 교회 순회 전도사 시절부터 평생을 농촌 목회에 헌신한 사역자였기 때문에 박 목사는 가난한 목회자 자녀로서 검소함과 경건 생활이 몸에 베여 있었다.
행정에 있어서도 교단에 편승하지 않고 지구 관리와 교인들의 출석을 철저히 점검했다. 교회는 빠른 시간 안에 수습되면서 1964년 4월에 부임하여 그해 10월 노회에 고신 교단으로 가입하기로 공동 의회에서 의결하였다.  

*참고 자료
1.1940년대 사상 주일 학교 교가
거룩도다 하나님이 복을 빌으시니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선한 동무나네
사랑함과 믿음으로 터 닦아 세운
우리 사상 주일학교 영원 무궁 만세
(올랭사인 곡에 맞추어)

2.사상 초등 학교 교가(교장 김길준 장로 작시)
삼각산 머리 먼동이 틀 때
구덕재 흰 구름 오색이 영롱
낙동강 이편 팔경대 마저
강선대 저녁달 신비한 경지
물 맑고 산빛 고운 여기가 사상
물맑고 산빛 고운 여기가 사상
(찬송가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곡에 맞추어)

3.지역사
1910년 : 한일병합조약 조인 공포1914년 : 부산부에서 동래군 사상면1918년 : 사상공립보통학교(사립명진학교) 1921년 : 사상역 준공으로 영업시작1923년 : 사상공립보통학교 준공(현 위치)1933년 : 낙동강 유역 대홍수1931년 : 낙동강제방공사 착수1933년 : 낙동장교(1930년-1933년3월)가설, 낙동강 유역 대홍수1935년 : 낙동강제방 완공(1931년 착공)1945년 : 해방1948년 : 정부수립1950년 : 6.25전쟁1963년 : 부산시편입, 부산진구 편입
제목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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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특기할 분과위 활동-3.2.1. 건축위-교회당 및 진입로 증 개수 공사 2010.07.21
3.2.2. 내규위-교인 생활 규범과 교회 내규 2010.07.21
공동 의회록 초록(1964-2009) 2010.07.28
당회록- 장로 피택에 관한 사료(1965-2008) (1) 2010.08.29
2011년 회계장부 작성요령(보조금을 지급받는 기관) 2011.05.10
장로 임기와 선임에 관한 당회 내규 2013.01.03
1.복음의 제 1 세대(1909-1927) 2013.01.03
2.복음의 제 2 세대(1927-1964) 2013.01.03
3.복음의 제 3 세대(1964-1995) 2013.01.03
4, 복음의 제 4 세대(1995-현재) 2013.01.03
제직 의회록 초록(1981-2009) 2013.01.03
개인 소장자료 공개 및 설명 2013.01.26
사상교회 설립 25주년기념 설립자 및 제직일동 (4) 2013.01.26
사상교회 설립25주년 기념부흥회 (3) 2013.01.26
사상교회 청년면려회 (2) 2013.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