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교회의 역사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시기(1909~1928)
(1) 덕포지역(1909-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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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덕포동 버스 정류장 인근의 중 강선대 부근
오른쪽 초가집이며 소래교회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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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세워진 교회-황해도 소래 교회>
초라한 초가 2칸 이지만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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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한 교역자 - 예원배, 김민수(22), 박찬규(27) 전도사

부산의 복음화는 호주 선교부가 부산과 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1909년 이전까지 사상지역에는 교회가 없었다. 이미 복음을 받았던 괘법의 장연식(상업), 삼락의 김용수(농업), 덕포의 황호연(의원), 감전의 박자연(상업) 제씨가 선교사들이 세웠던 부산 영선곡 교회(현재의 초량교회)까지 예배를 드리러 다녔다.

거리가 멀어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주일 성수가 어려웠기 때문에 1909년 즈음하여 중간 강선대(덕포동 1동 사무소) 인근에 초가 2칸을 구입하고 예배를 드림으로 최초로 사상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때에 덕포의 김석연, 괘법의 손치만씨가 입신하였다.
(2)괘내교회(1925-1926)
이 지역에서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김용수 어른과 그 아드님이신 김장권 영수의 가족들과 부산 제2상(부산 상업 교등학교의 전신)을 나와서 금융업에 종사하던 장연식 영수가 중심이 되어서 교회를 섬겨 오던 중 예배 처소가 협소하여 조금 더 넓은 장소를 물색하였다.
1915년 사상 역과 당시 사상초등학교(명진학교)가 있던 역전 부락인 괘내(속칭 가느곡) 부락에 초가 4칸의 예배 처소와 초가 2칸의 사택을 지어 이사 하였다. 이곳의 위치는 현재 사상역 맞은 편 북쪽으로 약 300 미터 지점이다. 교인이 약 20명 정도로 성장했으며 설교는 전담 교역자가 없어 순회하는 선교사와 조사(전도사)의 도움을 받았다. 1917년에 장연식 영수가 장로로 장립 받았다.

1922년경에는 기장 교회를 섬기던 김민수 전도사가 시무했으며 그는 대연(못골), 울산 구포 교회를 섬겼다. 1920년경에 새벽 기도가 시작되었고, 주일학교는 1926년경에 문을 열었다. 장연식 장로가 개인 사업으로 인하여 영도 교회로 옮긴 후에는 김장권 영수와 정찬모 영수가 교인들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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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곡 역전 부락으로 옮겼을 때 모습 추정(ㄱ자형 예배처소와 사택)
사상역 맞은 편에서 북쪽으로 약 200미터 후방이며 쇠락된 건물이 남아있다.

(3)창날(동괘법) 교회
경부선 복선 공사로 인하여 교회가 사상 역 구내에 편입되므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기로 하고 임시 예배 처소로 서괘법과 동괘법의 경계에 소재하던 공공건물을 임대하였다.
1927년 박찬규 전도사가 시무하던 중에 사모님이 교회당에 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들을 가르쳤으며, 교회 청년들은 야학을 열어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에 부녀자들은 거의가 문맹이었으므로 지역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복음이 뿌리 내리는 시기(1928~1945)
(1) 서괘법 한옥 기와 목조 교회(1928-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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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한 교역자와 순회 전도사
구종철(30), 오성문(32), 이승원(33), 최명수(37) 전도사, 정덕생 목사(40), 김희수 전도사(42), 임학찬 목사(43), 이여진 전도사(44), 이영규 목사(46), 김경원 전도사(47), 김인서 장로(51)

1928년 당시 괘법동 **번지(현재 천수탕 부근) 주변은 벼락산 서편 기슭에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비탈이었다. 괘내 부락(가느곡)에서 옮길 때에 이전비로 받은 470원과 30여명의 성도들이 헌금하고 몸으로 헌신하여 이곳에 75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건평 20평의 아담한 기와집을 지어 헌당식을 올렸다. 직업이 목수였던 정찬모 영수와 김장권 영수가 교회 건축의 중심이 되어 30여명의 교인들을 이끌었으며 온 힘을 다하여 교회를 건축했다. 1934년 9월에 교회창립 25주년 설립 기념 부흥회를 열고 전 교인이 교회당 마당에서 기념 찰영을 하였다. 미약한 초가 4칸의 교회에서 이제는 온전한 규모를 갖춘 건실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으니 온 교인들의 기쁨은 한량없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교회당으로 진입하는 길이 협소하여 불편을 겪고 있었는데 백영숙 권사의 집안에서 교회가 필요한 만큼의 사유지를 내어주셨다고 한다.
1934년 교회설립 25주년 기념촬영 (부흥회 강사 강상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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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에 구종철 전도사(구근숙 권사의 부친), 32년에 오성문 전도사, 33년에 이승원 전도사가 부임했다. 사모님이 유치원을 교회에서 경영했으며, 이승원 전도사는 애국심이 투철하여 만주와 일본으로 독립 운동을 한 경험이 있다. 김해 대지 교회에서 은퇴할 때가지 담임 목사로 시무했다. 설립 25주년을 맞아 강상은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부흥 사경회를 가졌다. 원근 각처에서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때 촬영한 사진에 기록된 설명을 통해서 교회 설립 일자를 밝힐 수가 있었다. 이후에 37년에 최명수 전도사, 40년에 정덕생 목사, 42년에 김희수 전도사, 43년에 임학찬 목사가 시무했다. 점점 더 가혹하게 조여 오는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 정신대와 강제징용, 극심한 가난과 핍절로 인하여 교회는 점차 그 힘을 잃어 가게 되었다. 1944년 일본에서 신학 수업을 한 이여진 전도사가 부임했다가 강제징용을 피하여 교회를 사면하게 되었으며 교회의 청장년들도 일제의 소개령으로 가족을 이끌고 양산 하북면으로 이주하여 종묘 생산의 명분으로 징용을 피해 잠시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1937년 사상교회 기독청년회 일동 (괘법 교회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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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당시 철도에 근무하던 민영석 집사를 비롯해서 몇몇 가정이 남아 힘들게 교회의 명맥을 유지했다. 민영석 집사는 신사 참배를 거절한 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후에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5기로 졸업하고 목사로서 평생을 복음에 헌신했다.
해방과 감격과 혼돈의 시기(1945~1962)
*시무한 교역자
사상 교회(총회 측) - 최문환 목사, 신재호 전도사, 이상호 장로, 김근수 목사, 한학수 목사
사상 중앙 교회(고신 측) - 허내용ㆍ김세주ㆍ최대현ㆍ김정규ㆍ남영희 전도사
=>사상교회(합동)) - 김경원 목사, 박창환 목사
(1) 해방의 감격 (1945~1950)
해방은 우리 민족과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잠시 떨어져있던 교인들이 다시 고향 교회로 돌아왔다. 신앙의 자유로 인한 감격과 함께 과거의 잘못에 대한 통회의 눈물로 교회가 뜨거웠다. 봄이 돌아와 해빙하여 소생하는 만물처럼 교회는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한편으로 해방의 감격은 온 강산을 기쁨으로 가득 차게 했으나 사상적 대립이 치열해졌고 치안이 공백상태가 되어 사회가 극도로 불안했다. 당시 질서 유지를 위해서 조선 민족 청년단(이른바 족청)이 만들어 졌는데 사상 지역에서는 교회 청년이었던 이재수 집사가 단장이 되고 민영석 집사가 총무를 맡았다.
(2)교회 신축을 위한 적산 이전(1945-1947)
해방이 되자 일본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적산)은 미 군정청 관할로 소속되었다.
괘법동 822번지(현재 제일탕 자리)에 있던 구 사상교회를 포함하여 현재 버스 도로에 까지 미치는 넓은 뽕나무 밭이 은퇴한 일본인 구포 주재소 소장의 저택이었다. 이른바 적산인 셈이다.

사상면의 유지들은 이 건물을 동사로 쓰기로 하고 미 군정청에 수속을 밟고 있었으나 교회는 이곳에 새 교회당을 신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숭실 전문을 졸업하고 호주 유학을 마친 허징수 집사(방문수 장로의 처남)의 도움으로 서류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제출했다. 허집사는 당시 동래에 있던 미 군정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적산 이전 문제로 동네와 교회가 심각하게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동네 유지들은 교회 측을 괘심하게 여겨서 이 일에 앞장 서는 사람에 대해서 3년 동안 3불통(언어, 물, 불) 하기로 결정하고 교회를 박해하였다. 비록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했지만 믿음의 어른들은 주변의 미움과 질시로부터 교회를 든든하게 지켜 내었다. 하나님 은혜로 취득한 이 적산 가옥과 대지는 당시 사상 시장터의 맞은편으로서 이 지역의 금싸라기 땅이었다.

교회는 건물이 자리잡은 부분 이외의 너른 뽕나무 밭은 당시 면장이 인감을 도용하여 교회 부지를 자신에게 불법으로 이전하고 이를 분할하여 사유지로 팔아 버렸다. 이 사건이 후에 송사 거리가 되어서 결국은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집단 패소하게 되었고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는 교회가 지역 주민들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3)교회 분열과 합동(1951-1960)
경남 노회는 일제 치하의 한국교회가 행한 신사참배에 대한 죄과를 회개함에 있어서 심한 다툼이 생기고 고려신학교의 존폐와 연관되어 대립이 심화되어 마침내 1952년 9월 진주 성남교회에서 열린 경남 법통노회에서 새로운 총회(고신측)를 결성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경남 부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분열의 태풍에 휩싸이게 되었고 사상교회도 역시 그러한 폭풍 속으로 딸려갔다.
교단이 분열되기 이전부터 서로 금이 가기 시작하여 따로 예배를 드렸다. 분리된 고신은 사택으로 사용하던 적산 가옥을 개조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교회 이름을 사상중앙교회로 개명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분열되고 보니 그토록 혹독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동고동락하던 교인들이 교파를 벽으로 하여 서로 비방하고 고개를 돌리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교회 분열을 서로가 안타깝게 여길 만큼 어느 정도의 냉각기가 지나고 앙금이 수그러들 무렵 한국 교계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1960년 10월에 대전 중앙교회에서 보수적인 교단이었던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을 추진하여, 12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하기로 가결하였다.

장로교의 두 교파 간의 합동 분위기가 나누어진 사상교회가 하나가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통합측이던 사상교회에 설교자가 공석 중이었는데 김해 공군 부대의 군목이었던 한학수 목사가 주일날 강단을 일시 맡게 되었다. 그분은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으며 아주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품성을 지녔었다. 그러한 한 목사의 노력이 합동의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교단간의 통합 분위기와 한학수 목사의 노력과 양쪽 교회의 어른들 간에 하나되고자 했던 간절한 뜻이 서로 모아져 마침내 동년 11월에 이르러 두 교회를 합하기로 하고 교회 명칭을 사상교회라 칭하며 소속은 합통측 노회에 속하기로 했다.

당시의 논리로 보면 이제는 통합도 고신도 아니니 서로 교단을 가지고 시비할 일이 없다는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논리였다.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형식적인 속박을 벗은 셈이다. 온 교회는 축제 분위기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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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교회가 하나가 되고 담임목사로 김경원 목사를 청빙 하였다. 김목사는 1947년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를 다니면서 본 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한 적이 있었다. 성품이 온순하고 덕망이 이 있어서 교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교회가 쉽게 안정되어 갔다. 사상시장 통에 구 사상중앙교회를 헐고 그 자리에 새 성전을 짓기로 하고 건축위원회를 구성했다. 교회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스레트 지붕을 얹고, 창문을 단 후 흙바닥에 의자를 놓고 신축 중인 교회로 옮겼다. 빨리 교회를 완공하자는 열의가 넘쳐나고 있었다. 하나된 교회는 활기가 넘쳤으며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 갔다.

서서히 분열의 먹구름이 외부로부터 몰려오고 있었다. 고려신학교를 존폐 문제가 쟁점으로 격화되면서 1962년 10월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 복교 선언으로 고신측은 환원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기류는 즉각 부산 경남의 각 교회에 또다시 분열의 회오리로 몰고 왔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김경원 목사는 고신의 분리에 대해서 명분이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환원을 반대 했지만 고신으로 환원하겠다는 교인들의 의견이 드세어 졌다. 새로운 성전을 기공하고 이제 완공을 눈앞에 두었던 때였다. 교인들은 또다시 두 쪽으로 나뉘어 졌다. 주일마다 강단을 차지하려는 공방전이 이어지고 새벽 기도 시간과 공적 기도 시간에는 서로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기도로 상대를 공박하는 볼썽사나운 깊은 혼돈 속으로 교회가 빠져들어 갔다.
(1) 덕포지역(1909-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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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점점 갈등과 분란에 휩싸이게 되자 김경원 목사가 희생적인 결단을 내리고 조건 없이 사면했으며, 고신의 환원을 반대하던 다수의 교인들이 싸움에 염증을 느껴 개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찾아 떠났다.
수습 위원회는 회의를 거듭한 결과 환원을 반대하는 이재수 집사에게 명분이 있다고 판단하여 구 사상교회의 지분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사상교회를 떠난 이집사 가정은 상당기간 동안 가족들과 부전교회에 출석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집사의 가정이 중심이 되어 합동 측에 속한 사상중앙교회를 개척했으며 지금의 한남교회의 모체가 된 것이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질서를 회복하게 하시고 새롭게 복음 사역의 영역을 확장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수습 위원회는 교회가 어떤 교단에 소속하지 않고 중립으로 지낼 것으로 천명하고 아직도 환원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교인들을 다독거리면서 분란을 점차 수습해 갔다. 해가 바뀌면서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교역자를 물색하던 중에 고 박창환 목사를 가술교회에서 청빙하였다. 당시 수습 위원회가 맞이할 담임목사에게 내건 조건을 보면 힘들었던 당시 교회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1. 교단에 소속하지 않는다.
- 2. 고려파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 3. 교회행정은 수습위가 맡는다.

1964년 4월 박창환 목사가 부임할 당시까지 교회는 건축이 중단되어 있었고 70여명의 교인들 마음 속에 분열의 상처가 깊게 잠재되어 있었다. 격렬한 다툼으로 인하여 영적 분위기가 황폐해져 있었다. 새로 부임한 박목사는 기도 생활에 모범을 보이면서 중립적인 위치에서 신앙생활의 원리를 철저하게 강조하는 방법으로 교인들을 지도했다. 교인들도 서로 간에 비방하고 헐뜯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불편부당한 목회자의 사역은 교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목회자가 교단 소속 없이 교회를 이끌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배려가 교인들의 마음에 자리잡아 갔다. 그리고 부임한 그 해 가을에 고신교단에 속하기로 공동의회가 의결하기에 이르렀다. 다름과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로 이루어 나가는 아름다운 전통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해 11월에 담임 목사로 위임식을 가지고 66년에 교회를 헌당하면서 손일용, 김성규 제씨가 장로로 장립되었다.

이미 장로였던 방문수 씨와 진해 지역에서 이사온 구연수 장로가 65년에 취임하고 두 분의 장로가 새로 임직함에 따라 당회는 더욱 공고해졌다.
성장과 발전의 시기(1972~1995)
부 교역자
이광수, 문성출, 변재창, 박의부, 류영기, 전태, 양희식, 박종기, 김병수, 김성배, 최정일, 정뱡재, 권경진, 박세열, 조윤태, 손현기, 이상갑, 김진, 손명호목사
전금순, 서윤근, 권기찬, 이종승, 변재창, 류영기, 전태, 장성환, 고면길, 박삼우, 정찬수, 전성환 전도사, 서상기, 고신원, 김대석, 최정일, 이승옥, 손외식, 박세열, 박재훈, 최동석, 김형민
이주형, 신봉철, 류신흥, 최수동, 이주형, 김진, 강만신, 박진휴, 박광웅, 김은섭, 김영석, 전성진, 장창희, 장종두, 정의수, 김영화(1995-98)
(1) 덕포지역(1909-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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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사상지역이 공단으로 지정되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주도적인 소수의 인적 결집이 교회를 움직이던 전형적인 농촌 교회의 형태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충원되면서 점차 도시 교회의 면모로 바뀌게 되었다. 경직된 교회의 분위기가 서서히 완화되고 가족 중심의 단순한 공동체가 점차 다면화 되면서 교회 구조도 한층 더 복잡하게 되었다.
교세의 성장에 부응하여
-72년 12월에 김종규 집사 장로로 임직되고
-74년에 변홍석 장로가 벌교에서 이거하여 장로로 취임했으며
-78년에는 김병석 ,김용수 제씨가 장로로 임직 받았다.
-82년에는 허상길, 이남정, 박흥식, 장판삼, 김기석 제씨를 장로로 세웠다.
-1968년부터 장립 집사를 세우기 시작했으며
-1982년부터 여집사 중에 신실한 분을 택하여 권사로 세웠다.
새로 이사 온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교단에 대한 구별이나 선호도가 점차 멀어지므로 다양한 교파에 소속되었던 신입 교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교단과 색깔이 중시되던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도 희석되어갔다. 사상 지역의 급속한 산업화와 더불어 수적으로 급성장하게 되었으며 담임목사의 지도력으로 인하여 교회는 내적으로 확고한 안정을 찾게 되었다.
(2) 2층 슬라브 교회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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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도에 사상 지역이 산업 단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구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교세도 눈에 띠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부응하여 교회를 이전하여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대지를 물색 하였다. 교회 신축 부지로 선정한 사상면 사무소가 있던 동산(속칭 면사산)은 시무 장로였던 방문수의 처인 허장수 집사의 친정 문중의 산소였다. 장손이 되는 허징수 집사(전 문교부 차관 역임, 당시 경희대 교수)는 50만원 가량의 분묘 이장비만 교회가 부담하기로 하고, 동산을 모교회의 신축 부지로 기증했다. 그리하여 1972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1975년 2층 슬라브 콘크리트 2층 건물을 헌당했다.
(3)민족 복음화와 전도 운동
70년도에 들면서 산업화와 더불어 민족 복음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담임목사가 대학생 선교회가 주관하는 이른바 전국 복음화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므로 전교회가 지속적인 전도 훈련을 받게 되었다. 구역과 지구도 순조직으로 전환하므로 구체적인 전도 실천 운동을 점화하였다. 72년에 대학생 선교 회관에서 개최하는 중앙 훈련에 참석시키고 그 열기를 몰아서 지역 간사를 초청하여 수시로 전도 집회를 가지므로 모든 교인들을 전도인으로 양성했다.
(4)교회성장과 적절한 전략
급속한 도시화에 대비해서 교회를 확장하고 구체적인 전도 방법을 교육한 점은 사상 교회가 산업화되는 지역에 복음화 비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년 수차에 걸친 전도훈련-제자훈련을 통하여 전교인의 전도 요원화를 기하였다. 지역의 급성장과 함께 교세도 급격하게 불어나게 되었다. 85년도에는 이미 교세가 1,000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교단에서 가장 괄목하게 성장하는 교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5)산업 전도회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던 청소년들과 청장년들을 위해서 교회가 산업 전도회를 결성했다. 당시에 산업화가 가속되던 시기였으므로 근로자들은 주일을 제대로 지키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이 쉬는 날을 택해서 예배일로 정하고 교회는 이들에게 식사도 제공하고 영육간에 쉼을 주었으며 친교의 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고된 작업 환경과 조건에서 육신적으로 피곤하고 지쳤지만 산업 전도회를 담당하던 헌신자들은 강도 높은 기도 훈련와 신앙 교육을 실시했다. 이들의 열정이 교회를 각성시키고 전 교인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단 근로자가 중심이 된 산업 전도회는 교회의 영적 각성과 전도에 크게 이바지 했다.

전도훈련과 제자훈련을 받아 잘 훈련된 전도회원들은 근무하는 곳에서 공단 복음화에 기여했을 뿐 만 아니고 직장을 옮기거나 고향 교회로 돌아가서도 그들이 배운 신앙의 열정을 가르치고 확산시켰던 점을 생각하면 이들에 대한 관심과 교육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된 셈이다.
(6)담임목사의 교단 활동
담임목사는 79년도에 총회장에 피선되어 교단의 여러 사인에 몰두하게 되었다. 80년부터 4년 동안 고신 재단 및 학원 이사장으로 봉사하였으며 이사장 시절에 고신 대학의 영도 캠퍼스를 신축하여 확장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고신 의료원의 신관을 건축함으로 복음 병원을 규모면에서 대형 병원으로 확장시켰다.
(7)교회 증축과 임직
1980년에 2층 교육관을 신축했다.
1984년 교회 75주년 기념으로 교육관 옥상과 예배실을 합쳐서 252평으로 증축하고 이성빈, 강석기, 권영동, 이정수, 윤형률 제씨를 장로로 장립하다.
1993년 1900평 규모의 아가페 선교회관과 신협회관 기공식을 가졌고 같은 해 주력 선교사로 김도범, 이주형 목사를 키르키스탄에 파송했다.
1994년 신협 이전 예배와 교육관 준공식을 가졌고 교회 설립 85주년 기념 예배와 한상순, 이성경, 임병태, 허성렬 제씨를 장로로 장립하였다.
1995년 박창환 목사 원로 목사로 추대하고 후임으로 박흥석 목사를 모셔오다.
(8)교회 개척과 지원 및 선교사 파송
1965년 엄궁 교회에 고 박도홍 목사를 설교자로 지원하고 이후 서윤근 전도사 파송하다.
1970년 감전동에 상가 건물을 임대하여 제2사상교회를 세웠으며 현재 샘물 교회로 발전하고 있다.
1983년 덕포동에 상가 건물을 임대하여 양희식 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개척하게 하다.
1985년 박영기 목사 일본 선교사로 파송
1988년 류영기 목사 일본 선교사로 파송
1991년 김상민 목사 키르기스탄에 선교사로 파송
1992년 박세열 목사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송
1993년 김도범, 이주형 목사 키르기스탄에 선교사로 파송
1995년 덕포동 아가페 회관에 은퇴 목사를 위한 은목 교회를 세우고 지원하다.
(9)신협의 설립
교인간의 상부상조의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 내에서 설립된 신용 협동조합은 초창기에는 조합 설립의 정신을 구현하며 많은 교인들에게 필요한 소액 자금을 까다로운 대출 요건을 갖추지 않고서도 융통하여 일상에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연간 이익에서 상당액의 장학금과 지역 주민을 위한 부조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사상 교회 신협에서 사상중앙신협으로 개명하여 교회로부터 분리 되면서 그 규모가 확대 되었다. 신협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아가페 선교 회관에 점포를 설치하였다. 규모가 커지면서 대출의 한도도 증가 되었으나 전문성이 결여된 관리자의 안일한 업무처리와 실무자의 고의적인 잘못으로 인하여 부실의 규모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국가가 경제 위기를 당하던 시기에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파산을 당하는 불행한 일을 당하였다. 거의 10년을 끌다가 2006년에 청산 절차를 완료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과 지역 주민들이 손해를 입게 되었으며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타격을 당했다.
(10)아가페 선교 회관 건립
1980년 담임목사의 미주지역 선교지 방문은 우리 교회가 선교 중심적 교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단 차원의 선교지 순방을 통하여 사상교회와 한국교회의 발전은 선교에 있음을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귀국직후 선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전 교회적으로 선교 사명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85년부터는 교회와 교단적으로 선교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는 시기였다. 본 교회는 80년 이후로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와 인재를 양성하여 85년 박영기 선교사를, 88년에는 류영기 선교사를 일본에 파송함으로 아시아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간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는 총20명이 되었다. 본교회의 후원선교사는 일본의 박영기, 류영기, C국의 이헌봉, 연변 해양 전문대학(김두환 선교사), 조윤태 선교사, 필리핀의 박세열, 김자선, 남후수, 정순성, 김재용 선교사이며, 방글라데시의 박현수, 박진섭, 노록수 선교사이며, 기관으로 아시아 선교 연구원, 네팔의 성경학교 등이 있다. 특히 본교회 단독 선교사로 파송된 김도범, 이주형 선교사와 김순자 협력 선교사는 중앙 아시아 선교에 집중했다.

담임목사는 사상 교회 선교 위원회와 인근 교회와 협력하여 아가페 선교회를 조직했다. 본래는 89년에 교육관 건립의 용도로 295평을 매입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아가페 회관의 부지로 전용되어 93년에 이곳에 아가페 선교회관과 신협 회관의 기공식을 가졌으며 95년에 지하 2층 지상 8층 연 건평 1900평 가량의 건물을 완공했다.
(11)담임목사 박창환 목사의 은퇴
1964년 4월 5일 가술교회에서 부임하여 그해 11월에 위임식을 가진 박목사는 1995년 12월 14일 만 70세에 이르매 헌법에 따라 공동의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고 퇴임하게 되었다. 시무하던 초기에는 교단 문제로 교회가 안정되지 못하여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솔선하여 기도하고 경건생활에 매진하므로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면서 원칙을 중시하는 신앙생활을 실천해 나갔다. 시무하던 31년 동안 내내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목양일념으로 초대교회에서 이어온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순수신앙을 잘 지켰다. 때로는 엄격하게 교훈하기도 하고 칼날같이 매서웠지만 교회 성장을 향하여 매섭게 다그치던 탁월한 행정능력은 그분의 시무기간 동안은 항상 건축과 증축을 반복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지도력이 인정되어 교단 총회장과 재단 이사장을 맡아 교단적인 큰 일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박창환 목사의 시무기간은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경제성장 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국가의 변모에 따라서 우리 교회도 농촌 시골교회에서 도시교회로 바뀌었다. 부임 당시 건평 45평으로 전교인이 예배를 드리던 작은 교회가 퇴임 시에는 1000명을 넘어 서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비젼 선포와 성숙의 시대(1995~ )
부교역자-백종인, 홍종석, 강성익, 복기훈, 김영찬, 김상욱, 하원식, 황중경, 정인규 목사
이명동, 전병백, 윤상혁, 양미화, 윤나경, 안우열, 김종혁, 최우석, 김창태, 조순희 전도사
(1) 박흥석 목사의 부임와 아가페 회관의 청산
(*현재 담임목사의 부임 이후의 교회 변화는 정리 중입니다.)
1995년 12월 박창환 원로목사 추대와 후임 박흥석 목사의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순조로운 담임목사 교체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이 시기에 어려움을 당하여 교회가 위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우려는 우리교회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신협의 부조와 아가페 회관의 청산 문제로 교회가 재정적 어려움과 함께 첨예한 책임공방으로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너무 힘겹도록 달려온 성장의 피로감과 비판적 시각이 길고도 어두운 터널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신협의 부도와 아가페 회관의 건축과 관련하여 행정적 흠결과 재정적 손실에 대해서 서로가 고소 고발하는 사건도 잇달았으며 물질적 손해를 입은 교인들의 교회와 중직자들을 원망하며 그 공방으로 교회를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갔다. 당회는 수습 위원회를 결성하고 원만한 문제해결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교인들을 다독거려 나갔다. 교회가 당한 금전적 손실에 대한 채무변재를 위해서 3년을 한하여 무이자 채권을 발행하여 임직자들이 나누어서 짐을 졌다. 작은 물질이지만 성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마침내 2006년에 이르러 아가페 문제는 법적인 모든 청산절차가 종결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겪었던 고통과 심적인 상처와 물질적인 손실은 아직도 치유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후임자의 부임과 함께 찾아온 긴 시련의 기간은 비록 견디고 극복하기가 힘들었지만 오히려 전임자의 틀을 빨리 벗고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간 관행으로 이루어져왔던 미비한 교회 행정과 질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교회의 모습으로 변화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점은 고난에서 얻어진 값진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 교회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2)교회일지
1. 임채호, 최금열, 장승현 제씨를 장로로 세웠다.(01)
2. 박규원, 구영회, 진종철, 김종한, 김인구 제씨를 장로로 장립하고 장립집사와 권사를 각각 15인씩 세웠다.(02)
3. 교회와 인접하고 있는 구 사상보건소(대지 305평 건평 375평)를 매입하여 리모델링한 후에 교육관으로 사용했다(02)
4. 2003년 장기기증협회의 집회 결과 기증자들이 서약했으며 실천적 시술이 이루어졌다.
5. 중 삼층에 이르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노약자의 편의를 도모했다.(04)
6. 교회의 비젼의 3대 목표를 세우다.(05)

"신앙을 전수하게 하소서"
"지경을 넓혀 주소서"
"배가 되게 하소서"

업무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하여 4개의 소위원회를 만들다.
기획 분과(100주년 행사 총괄)
건축 분과(주차장, 식당, 본당 리모텔링)
내규 분과(교회 규칙과 교인 생활 규범 작성, 장학회 정관)
교회사 편찬 분과

7. 비전 기금 적립 : 매달 경상비에서 2천만원씩을 떼어 발전기금으로 사용하기 로 하다.(06)
8. 요셉 장학회 설립 : 후진양성을 위해서 폐기된 장학회를 복구하였으며 전교 인이 월정으로 장학 헌금을 작정하고
주일헌금에서 경조부분을 장학회로 주기로 하다.(06)
9. *장로 시무규례를 정하고 임기를 65세로 단축하고 안식년을 도입했다.(06)
10. 주변의 부지 도면을 당회실에 붙이고 적극적으로 매입하기로 결의하다.(07)
11. 권철현, 노승식 씨를 장로로 피택하다.(07)
12. 교회 내부를 확장 리모델링하고 화장실과 입구에서 본당에 이르는 진입로를 개수하다.
13. 교회 인근의 주택을 매입하여 헐고 주차장을 증설하다.(08)
14. 박창환 원로 목사께서 소천하고 유족들이 거처와 현금 오천만원을 장학재단에 기증하다.
15. 교회 설립 100주년을 시작하는 예배와 행사를 가지다.